세상 제대로 보기

[미디어충청] 동일본 대지진 1년, 후쿠시마 현장을 가다.

해적70 2012. 3. 5. 14:22

일본의 원전피해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전무합니다. 또한 일본 국민들의 원전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보도도 간헐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MB는 핵안보를 위한 정상회의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유수의 우리나라 언론이 꺼려하는 일본 원전사태를 심층 취재하기 위해 일개 인터넷언론 기자가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피폭에 대한 우려, 숙소와 언어 등의 장벽을 뒤로 하고 홀홀 단신 일본으로 건너간 정재은 미디어충청 기자의 글을 블로그로 옮겨왔습니다. 원문은 아래를 누르시면 볼수 있습니다.

미디어충청 www.cmedia.or.k




방사능 공포 악순환... 희생자는 말이 없다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4)] 후쿠시마(1)


도쿄에서 약 240킬로미터,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후쿠시마 시내. 고속버스로 6시간가량 달려 온 취재진을 반긴 건 컨테이너 박스 몇 채이다. 원전 사고 이후 피난민들의 가설주택인데, 한 겨울을 어떻게 견디나 싶을 정도다. 찬바람이 틈새로 치고 들어올 것 같은 그곳에 깨끗이 빨아 널어놓은 옷들이 춤을 춘다. 

후쿠시마현은 일본 도호쿠 지방 남부에 있는 현으로, 현청 소재지는 후쿠시마시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사람들에겐 ‘방사능 공포’로 각인된 도시다. 

가설주택 [사진총괄 : 도영, 정재은]


방사능 수치 측정한다 해도... 사람이 사는 곳

상대적으로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인가. 들어서자마자 입안이 미끈해지고, 뱃속이 울렁거린다. 방사능 0 베크렐 야채 까페 ‘하모르’에서 만난 후쿠시마시민 사이토 아케미(44세) 씨도 그런 증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방사능 공포’란 단어가 잊힐 만큼 얼굴을 스치는 차갑고 맑은 공기는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사람들은 정류장서 버스를 기다리고, 일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쇼핑몰에서 물건을 산다. 눈에 보이는 않는 공포는 원전 폐로 목소리와 핵발전을 반대하는 다양한 행동으로 확인되고 있다. 

후쿠시마역에 도착하자 도쿄 신주쿠, 미야기현의 센다이 시내보다 일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방사능 개인 설량계를 보니 0.840 마이크로시버트(μSv/h)를 가리킨다. 도쿄 신주쿠 도심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취재 결과 도쿄 도심보다 평균적으로 높은 방사능 수치를 나타냈지만 바람, 빗물 등 환경에 따라 이동하는 방사능 물질을 일관되게 적용하긴 어렵다. 핫스팟이 이미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 문무과학성에서 제공하는 대기중 방사능 평균 수치 역시 신뢰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또 문무과학성에서 각 종 방사능 수치를 시간대별로 발표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데이터를 보기 어렵게 해 놨다는 불만이 올라온다. 


때문에 어떤 이는 ‘비영리 개인에 의한 방사능 정보 서비스’ 홈페이지(www.atmc.jp)를 운영하기도 한다. 홈페이지 운영자는 “개인이 지진 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하고 있다”며 “각 페이지의 정보는 정부 기관 및 지방 발표 공식적인 자료에 근거해 작성하고 있다”고 알렸다. 

후쿠시마역 주변은 3.11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후쿠시마역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지하도 벽면에 수많은 재해-원전 관련 포스터가 붙어있다. 

정부 환경성에서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제염에 관한 도움을 주기 위해 이를 지도하는 전문가들을 파견한 센터를 만들었다고 홍보했다. 일본 정부는 사고 이후 방사능 물질 제거 대규모 제염(오염제거)에 나선 상황이다. 또, 자위대가 동일본 대지진 재해 복구 활동을 선전하고, 정부기관과 후쿠시마 의과대 등이 추진하는 ‘아이들 관광과 환경에 관한 건강 조사’, 정부가 위탁사업으로 진행하는 복구지원단 모집 광고가 눈에 띤다. 피난소 건설, 가설주택 운영 등 일자리만들기 사업이다. 

각종 홍보 사이로 3.11 원전 사고 이후 탈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각종 단체들은 후쿠시마, 도쿄, 고리야마 등 3.11 사고 1년을 맞아 탈핵(반핵)을 주장하는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또 ‘후쿠시마 사고 1년, 무엇이 바뀌었나’, ‘핵발전에 대해’ 등 다양한 주제로 소규모 모임(카페 등)들이 토론과 강연을 제안한다. 

그리고 거리고 나가면, 곳곳에서 감세를 주장하는 선전전, 정부 지원이 아닌 시민 모금을 통한 후쿠시마 아이들을 위한 병원 건설 활동, 방사능 0 베크렐 카페 운영 등 궁극적으로 원자력발전을 멈추어야 한다는 행동들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대량 폐기물”

후쿠시마역에서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 건물 1층에 제염과 폐기물 처리에 관한 센터가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환경성에서 사고 이후 준비하는 센터로, 같은 건물 7층에 환경성 사무실이 있다. 환경성 관계자는 "후쿠시마 시내에 이곳 한 센터만 문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방사능 유출 이후 제염과 폐기물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환경성 호소노 장관의 ‘재해 폐기물의 광역 처리 추진에 관한 영상 메시지’로도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환경성 홈페이지에서 장관은 “이번 동일본 대지진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의 대량의 폐기물이 나왔다. 이 폐기물을 여력이 있는 곳으로 받아주어 제대로 처리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광역 처리는 충분히 안전성을 확보하고 추진​​할 것이다. 여부,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를 부탁한다”고 전했다. 


환경단체와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정부는 후쿠시마지역으로부터의 오염된 토사들을 일본 전 지역으로 분배해서 처리할 계획이다. 환경성이 추산하기에, 이와테현, 미야기현 및 후쿠시마현 등 해안 지대에서 대재난으로 생겨난 건축폐기물은 약 2천3백8십만 톤에 달한다. 이미 지난 11월 이와테현에서 도쿄로 대략 천 톤의 폐기물 첫 운송이 시행되었다.

이와테현 지방정부는 이 폐기물에 133베크렐(bq/kg)의 방사능물질을 함유된 것을 추정했다. 작년 3월 이전이라면 불법인데, 정부는 7월에 건축폐기물안전수준을 100베크렐에서 8,000 베크렐로, 10월에 다시 10,000베크렐로 상향조정했다. 도쿄는 총 50만 톤의 폐기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엄청난 양의 물질들을 위한 임시보관소를 찾고 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된 폐기물은 일부분 소각되었다. 소각되었다 해도 매연을 통해 생긴 방사능은 또 확산된다. 결국 원전 사고 이후 발생된 핵폐기물 처리는 속수무책으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또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접 피해 지역 중 약 92제곱킬로미터(㎢) 지역에 대한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을 포기했다. 방사선량이 50밀리시버트(mSv)가 넘어 현재의 오염 제거 기술로는 방사선량을 20밀리시버트 이하로 낮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환경성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주변 피폭 지역에 대한 방사능 오염 제거 계획으로 지상 1미터 높이에서 측정한 방사선량 기준에 따라 피난지시 해제 준비구역(20mSv이하), 거주 제한 구역(20mSv초과 50mSv이하), 귀택 곤란 구역(50mSv초과)로 나눈 바 있다. 50밀리시버트 이하 지역은 2014년 3월까지 주거 가능 기준치로 낮출 예정이라고 한다. 

죽음의 땅을 생명을 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환경성이 후쿠시마에 설치한 센터에서 보급하는 자료만 봐도 근본적인 대책이라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이 자료에 의하면 설사 저농도 방사능 지역이라도 할지라도,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사람들이 방호복을 입지 않고, 일반 마스크를 쓴 채 작업하는 사진이 수시로 눈에 띤다. 어느 하수구 등이 핫스팟(고방사능 지역) 일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임시방편으로 방사능 물질 농도를 낮추기 위해 굴삭기로 땅을 파 지상과 지하의 땅을 뒤집어 묻어버리는 것을 권고하고 있기도 하다. 방사능 물질 유출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라도 부어버려야 하지만 수천, 아니 수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콘크리트로 부어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3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이와키시 해안의 작은 마을 요쓰쿠라 마치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이와키시는 지진-원전 사고로 347명이 사망하거나 행불됐다. 

지진과 원전 사고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발버둥치는 사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3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이와키시 해안의 작은 마을 요쓰쿠라 마치의 희생자들은 말없이 누워 있다. 

* 통역 : 일본노동넷 야스다 씨


어둔 밤 별만 반짝...3.11 잊지 않기 위해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5)] 센다이 미디어떼끄 호소야 씨


미야기현의 센다이시는 도호쿠(동북)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센다이 연안부 지역은 지진 해일 피해가 심하고,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는 약 10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연안부 마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센다이 시내도 지진 피해를 입었고, 원전 사고로 고통 받는 도시 중 하나다. 

이 가운데 미디어활동가들이 시민들과 교감하는 센다이 미디어떼끄도 지진 피해를 입었다. 복구 작업으로 올해 1월 27일 건물 7층에 제 모습을 찾았다. 

3.11 사고 이후 센다이 시내에 있는 미디어센터도 피해를 입었다.

이곳 미디어활동가들은 ‘3.11을 잊지 않기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였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최소 3년가량 진행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센다이시에서 위탁받은 문화재단에서 재정을 지원받았다가 현재 네덜란드 한 재단에서 기금 지원을 받고 있다.

미디어떼끄는 스튜디오 기능이 갖춰져 있어 시민들에게 비디오 카메라 등 기자재를 대여하고, 그 성과물들이 다시 떼끄로 모이게 하는 공공 자산이다. 그런 시스템을 활용해 시민들은 자신의 피해를 말하기 시작했다. 영상 시스템을 활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내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아카이브를 구축한다. 

3.11 지진-원전 피해 1년을 돌아보며 평가와 계획들을 자발적으로 이야기하는 시민 모임도 만들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별이 있는 하늘과 길’이란 모임이다. 이 모임 이름은 지진 직후 전기가 모두 끊어지고,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뜬 하늘의 별이 기억에 남았다는 많은 시민들의 증언으로 붙여졌다. 

모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시미즈(28세) 씨는 “사고 이후 1년 동안 복구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다. 그래도 그 별들을 보았던 이전의 모습으로 절대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방법을 찾기 위한 모임이다”며 “그 길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왔던 길을 돌아보고, 길을 찾는 다양한 방법을 서로 나누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여러 직업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꼭 많은 시민들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미디어떼끄로 와서 우리와 함께 같이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가운데 <미디어충청>은 도쿄에서 센다이로 와 미디어떼끄의 ‘3.11을 잊지 않기 위해’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호소야(28세) 씨를 만나보았다. 작년 4월 센다이에 온 그는 7월 센다이로 이사까지 하며 장기간 현장 활동을 시작했다. 호소야 씨를 통해 그가 하는 일과 센다이 시민들의 단면을 살펴본다. 

눈에 보이는 피해가 전부가 아니다
가설 주택 거주자, 독거 노인 등... 고립되고 생활 파괴
[인터뷰] 호소야 씨


무슨 작업을 하는가

취재하면서 지진 해일 피해를 입은 센다이 시민들을 만난다. 현재 센다이 미디어떼끄는 지진과 해일 피해를 중점으로 기록한다. 지진 피해를 입거나 피난 와 살고 있는 시민과 같은 눈높이로 기록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상 아카이브 작업을 하고 있다. 학교 선생님 등 다양한 시민들을 만나 지진 때 어디 있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을 질문하고 그들의 증언을 비디오로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을 편집해 자료들을 비디오 클립으로 만들고, 웹에 올린다. 

사고 이후 1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난 이유도 있겠지만 센다이 시내는 큰 피해는 없었던 것 같다. 도쿄에서 4월 처음 도착해서 이곳 풍경은 어땠나

시내 건물, 역사는 큰 피해가 없어서 큰일났다는 느낌이 없었다. 센다이는 지진 전에도 몇 번 왔었다. 동네가 변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역사가 조금 깨지고, 공사용 시트로 가려져 있었다. 신칸센도 멈춰 섰다. 

하지만 항구나 바다에 가서 취재하다 보면 냄새가 심하고, ‘이게 해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연안부에 갔을 때 무엇을 찍어야 할 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상태를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해가 심한 이시노마키의 경우 자원봉사자들이 노력해 쓰레기도 치우고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그래도 집, 학교가 없어지는 등 피해가 크니까 아직 갈 길이 멀다.

또, 눈에 보이는 피해가 다가 아니다. 생활이 파괴되었다. 제대로 된 것 같지만, 그 지역 생활들이 모두 다 망가졌고, 지역 경제도 파괴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전국적인 대형 슈퍼 ‘이온’이 있는데, 피해 지원금을 받은 시민들이 주말에 이온에 가서 물건을 한꺼번에 사 가지고 간다. 슈퍼가 이온 밖에 없고, 그 돈은 다시 도쿄로 흘러들어간다. 부흥자금을 투입해도, 지역으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도쿄 쪽으로 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교육도 문제될 것 같다

학교가 해일 피해로 넘어간 곳은 학교 자체가 없으니까 다른 동네 학교에 가서 수업 받는 상태이다. 

3.11 사고로 인해 사회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지만 가정불화, 자살 등의 소식이 들려온다. 촬영하면서 그런 경우를 자주 접하는가

사실 가설주택 문제가 심각하다. 고립된 사람들이다. 최악의 경우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혼자 죽었는데, 죽은지도 모르고 나중에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하고 있던 농사할 수 없게 되니까...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이다. 농사로 만들어진 근육이 일주일 쉬고 있으면 다시 움직이기 힘들다고 한다. 가설주택 피난민들을 위해 자원봉사단체나 종교단체가 여러 가지 이벤트를 하지만 당연히 한계가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생 농사 밖에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그 일이 없어지면 인생이 없어진 것이다. 생활이 파탄 나는 것이다. 

또, 직접들은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가설주택에 사는 사람들 중 알코올중독에 빠지거나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제일 인상에 남는 사람은 센다이 가모우 지역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어려움을 드러낸 이야기였다. 그 선생님은 지진 해일 피해 때 학교에 없었는데, 피해 소식 듣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며 급히 돌아왔다. 가기 전에 무전기도 빌렸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구조대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에 기차를 차고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가 피난소였는데, 선생님이 가방에 초콜릿과 과자를 잔뜩 가지고 가서 학생들과 만났다. 초콜릿이 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와~” 하면서 모였단다. 그 이후에 자위대가 헬기로 구호물품 전달해 줬다고 한다. 

작년 3.11 사고 후, 전부 쓸려가버렸다. 센다이시 연안부 가모우 지역.

작년 3.11 사고 후, 전부 쓸려가버렸다. 센다이시 연안부 가모우 지역.

지진 해일 피해 복구로 방사능 측정 여력이 없기도
“방사능이 위험해도 일단 오늘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문제가 심각한 데, 직접 방사능 피폭 정도를 측정하는 시민들도 있는가

시민 중에는 방사능 측정을 직접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음식이나 흙이나 등 여러 가지를 측정한다. 개인 설량계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농민, 특히 유기농 농업을 하는 농민들은 직접 농산물 측정소를 운영하고 있다. 지진 해일 피해 복구에 치중하고 있어, 방사능은 측정은 여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센다이는 방사능 오염이 후쿠시마 원전 인근 지역보다 심하진 않지만 신경 써야 하는 수치이다. 

지진 해일 피해 복구시 방사능 피폭도 고려해야 할 것은데

쓰레기 치우거나 하수구 정비 등의 일을 할 때 방사능과 관련한 대책이 없다. 방사능 수치가 높은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데 거기에 대한 방호대책이 없는 것이다. 일을 할 때 방호복도 입지 않고 그냥 일을 하기도 한다. 이시노마키 해안에서 쓰레기 청소할 때는 동네 어린 아이가 바닷물에 그냥 들어가는 데 아무런 제재를 안 했다. 후쿠시마 원전이랑 가까운 거리인데도 말이다. 또, 아키타 현에서는 비가 오는데 아이들이 우산을 안 쓰고 그냥 비를 맞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방사능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그렇다. 

정부, 지자체에서 방사능 방호와 관련한 매뉴얼을 각 가정에 나누어주는지

지자체에서 형식적으로 그런 것을 만드는 데, 나는 직접 받은 적이 없다.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 많이 걱정하는 것 같다

도쿄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이 걱정한다. 특히 음식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진 해일 피해로 당장 집이 없고, 일자리가 없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걱정이 크다. 방사능이 위험해도 일단 오늘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방사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사고 이후 TV서 반복적으로 처참한 모습 방영
어딜 가나 지진, 원전 얘기...“아, 미치겠다”
피해 지역에 와서 삶에 대한 힘이 생겨


센다이에서 지진 해일 문제를 촬영하기 전 도쿄에서 집중하던 영상 주제는 무엇인가

1960년대 일본의 영화나 미술에 관한 미디어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상 활동의 사람들의 구술 작업도 했다. 또 하나는 사회운동과 관련해 시위나 집회의 영상을 비디오로 찍는 작업을 했다. 

영상 찍는 작업을 오랫동안 했나?

처음 영상을 찍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60년대, 특히 실험영화에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영화를 보면서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테라야마 슈지(아방가르드 극작가, 감독, 작가로 다양한 활동을 한 일본의 대표적인 전위 예술가) 감독의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사회운동의 시위나 집회 촬영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미디어 활동가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험이 있나

동료들은 구속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 그래도 일본의 경우 현장에서 경찰한테 구속당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나는 항상 경찰에게, 그리고 우익들에게 욕먹는다. 

촬영하다 경찰에게 욕먹으면 기분 나쁜 텐데(웃음)

물론 화나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양아치 소리를 들었다. 경찰은 내게 “양아치 새끼야, 호소야”라고 한다(웃음).

도쿄에서 센다이로 와서 머물면서 장기간 작업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계기는?

그렇게 큰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3.11 지진 원전 사고가 일어난 이후에 TV에서 반복적으로 관련 영상을 방영했다. 계속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끌 수가 없었다. 그런 영상에 뒤집어 쓰인 상태였다. 신체적으로 너무 피곤하고, 힘든 상태였는데, 지인이 4월부터 센다이에 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4월, 센다이의 가모우 지역 항구에서 자전거 타면서 사고 직후 피해가 느껴지는, 지독한 냄새를 맡았다. 그때 “아, 나는 살고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온 몸의 감각이 살아났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삶에 대한 힘이 생겼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옛날부터 계속 미디어 상영을 통해 생각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 것을 신체적으로 체험했다. 정보들이 나한테 일방적으로 계속 오고, 나는 수동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딜 가나 지진-원전 문제 얘기였다. “미치겠다 정말!”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여러 가지로 자신의 일상을 찾아갔을 텐데, 나는 항구에 가서 몸으로 느끼며 일상을 찾아간 케이스다. 또, 4월에 큰 집회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모며 일상을 찾아갔다. 

호소야 같은 미디어 활동가들이 많이 있는가. 사고 지역에 머물면서 집중해 취재하는

도쿄나 다른 지역에서 센다이에 왔다 갔다 하면서 미디어 활동, 지원하는 사람들 많이 있다. 나처럼 이사 와서 장기간 취재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여기 살고, 같은 공기 안에서 음식을 먹고, 생활하면서 미디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신체성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록 자체가 역사이긴 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호소야 씨가 바라는 바가 있다면

국가나 제도, 권력에 대해서 일 시작하기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지진-원전 사고 이후 미디어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됐다. 표현이 좀 어려운데, 일반적인 미디어와 다른 미디어, 아우토미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말이지만 미디어는 메시지다. 도구가 아닌 메시지, 바꾸어 말하면 미디어는 우리 사회를 더 생기 넘치는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역 : 일본노동넷 야스다 씨




피난민 “3.11 일주일 뒤 도쿄 도착해 울었다”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6)] 후쿠시마 원전 7km 피난민 (1)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불과 7km 떨어진 나미에마치에 살다 피난 온 다카다(78세) 씨가 그나마 가설주택이 아닌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어 쫓겨날 위기는 면했다고 한숨을 쉰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그랬고, 재해 법률상 피난민들은 입거한 날부터 2년까지만 가설주택에서 살 수 있다. 다카다 씨는 “둘째 딸이 이곳으로 오라고 해 운이 좋아 안정적으로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설주택에 살고 있다”며 “그들은 마음속에 답답함과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돌아갈 수 없는 땅, 지진 해일 피해와 원전 사고로 피난 지역인 후쿠시마 원전 20km 경계안 사람들은 일본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있다. 정부는 사고 이전 20km 내 거주하고 있던 인구 약 7만8천2백명 중, 사고 이후 작년 4월 22일 10개 지역에서 약 8만5천명이 대피하고 있고, 그 중 어린이가 약 6천명이라고 발표했다. 

도쿄 가와사키시 다카츠구에 위치한 시영아파트(총 5개 동)에 살고 있는 피난민은 8가구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타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라 서로 잘 모른다. 그는 나미에마치에 살던 이웃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전화로 안부만 확인한다고 했다. 

3월 11일을 회상하던 다카다 씨는 쉬지 않고 전쟁 같던 시간을 풀어냈다. 그는 딸 부부와 손자, 손녀와 함께 도쿄로 향했다. 

[사진 총괄 : 도영, 재은]

점심값 1천엔, 담배도 없고...농사 복장 그대로 피난 가
어디로 가야 하나... 원전 폭발 듣고 “이제 멀리 가야겠다”
10리터 20리터씩만 주유... 가다 서다 일주일
소, 돼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야채 가게로


작년 3.11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것 같아요

수도, 전기 다 끈기고, 슈퍼도 없고. 전화는 가끔 됐죠. 지진 쓰나미가 낮에 났으니 망정이지 밤에 그런 사고 나면 아마 패닉 상태였을 거예요. 

지진이 너무 많이 흔들려서... 밭에서 일하고 있다 잠깐 집에 들어갔는데 “지진 왔다, 와! 큰일 났다”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조금 흔들리다 멈추더라고요. 그래서 정리하려고 돌아가는데 또 지진 나고, 또 나고. 뭐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더라고. 큰일 났다 생각하다가 쓰나미가 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나는 농사 복장 그대로 도망갔죠. 점심 사 먹으려고 가지고 있던 1천엔이 전부였고, 담배도 없었죠. 도쿄에 왔을 때 농사짓다 왔으니까 옷에 흙이 그대로 붙어있었죠. 그 정도였어요. 

이와떼현 지진 쓰나미 피해하고, 후쿠시마현하고는 전혀 다른 피해예요. 지진 강도 M9로 최대 지진이죠. 쓰나미도 너무 크고. 쓰나미 와서 차도 막히고, 어디로 가면 되는 지 아무도 몰랐어요. “멀리 피해라!” 하는데 아무도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랐어요. 원래 심정으로는 멀리 가고 싶지 않았지요. 다음날 원전이 폭발했다고 소식 듣고 “아, 큰일 났다. 이제 멀리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1천엔 가지고, 몸만 빠져나왔네요. 다시 돌아가 본 적이 있나요

네. 집에서 아무 것도 못 가지고 나와 도망갔죠. 집은 지진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문도 닫을 수 없는 상태였어요. 그냥 집을 포기했었던 거죠. 도망 올 때 소, 돼지 등 가축들이 자유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고, 야채 가게 같은 곳에 들어가서 모두 먹어치웠죠. 사고 뒤 한번 가본 적 있는데, 통장, 사진 등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나왔어요. 

다카다 씨.

피난 갈 때 이동은 어떻게 했나요? 도로도 끈기고

자동차로 갔는데, 차에 기름이 없어서... 10리터 20리터씩 밖에 주유가 안 됐어요. 조금 가면 기름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10리터씩 밖에 안 주니까 어쩔 수 없이 10리터만큼만 가고. 멀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죠. 천천히 가다 멈춰 섰다 하는 상태가 일주일 정도 계속됐죠. 휴대폰으로 여기 저기 연락하면서. 다 도망가니까 길도 막히고, 도쿄 등지에서 음식을 보낸다고 해도 화물차가 못 들어오니까 물건이 들어올 수가 없었죠.

긴급 차량 주유는? 주유서도 무너진 곳이 많았을 텐데요

복구차량, 긴급차량은 우선적으로 주유가 가능했어요. 누구에게 적게 주고 누구에게 많이 주면 문제가 생기니까 10리터,, 20리터씩 준다고 약속을 하고, 그렇게 운영한 거죠. 또 지진 해일 피해가 심해서 정유회사가 멈췄죠. 정유회사도 정부가 명령해서 자유롭게 기름을 팔 수 없었죠. 

후쿠시마는 쌀이 많은데, 그래도 물이 없어서
주먹밥으로 하루 한 끼...피난소 사람들 떠나면 나도 가야겠다
편의점 주인 “후쿠시마 사람, 방사능 때문에 쓰레기 버리면 안 돼”


잠은 주로 차안에서 잤겠어요?

밤에는 차 안에서 자기도 하고, 피난소에서 잔적도 있죠. 피난소는 매일 매일 사람들이 바뀌었죠. 전날에 옆에 있었던 사람이, 다음날에 없어지고. 사람들이 떠나니까 ‘나도 가야하나... 그럼 가야겠다’ 하고 다시 떠나는 것이다. 

일주일 정도는 몇 시간마다 지진이 계속 왔어요. 그게 힘들었죠. 피난소에 자원봉사자도 안 모이고. 왜냐면 모두 자기 집에서 옷만 챙겨서 나왔으니까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재해 관련 네트워크가 있는데, 이곳에서 모여라 부탁해서 몇 명이 왔어요. 식량도 문제였죠. 후쿠시마는 쌀이 많은 현인데, 그래도 물이 없어서 요리를 할 수 없었죠.

음식은 어떻게 해결 했나요

주먹밥 해서 먹었죠. 하루에 한 대. 피난소에 가면 세 끼 중 한 끼 주는 피난소 있었고, 보통 하루에 한 끼씩 먹었죠.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모이는 피난소에 가면 상황이 좀 좋은 편이었고요. 

씻지도 못했을 텐데, 양치질이라도 했나요

세수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일주일동안 너무 춥고, 씻을 수 없고. 일주일 후에 딸아이 집에 가서 목욕했는데, 그때 울었답니다. 

밤에 너무 추웠지만 피난소는 담요 두 장 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춥다 춥다 하고 하는데 공무원들이 두 장 밖에 없다며 담요를 더 주지 않았죠. 사실 많이 있었는데, 규정 때문에 주지 않았죠.

일주일 동안 천천히 가다 서다 움직이는데, 화장실도 만만치 않았겠어요

편의점 화장실로 갔죠. 편의점 주인은 문 앞에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계속 감시했어요. 후쿠시마서 온 사람들은 방사능 붙어 있다는 거죠. 우리가 쓰레기 버리면 그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편의점 주인도 모르잖아요. 주인은 그냥 가게 앞에 서서 버리면 안 된다고 막았지요. 

모두 다 혼란...“정확한 정보와 운이 좋아 살아 남았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TV 보고, 그냥 TV 보고...“손자, 손녀 돌아가고 싶다 하죠”


피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피난할 때는 냉정하게 생각해서, 정확한 정보를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모두 다 혼란스러워서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정확한 정보만이 살 길이죠. 

또 하나는 운이 좋아야 해요. 나의 경우 나쓰시오바라 라는 동네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가 움직이고 있다, 그곳에 가면 도쿄로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나쓰시오바라까지 어떻게 가야 할 지 몰랐어요. 그때 운이 좋았던 게, 택시 회사가 있었는데 여기서 기름을 팔았죠. 택시 타고 가는 대신에 기름 사서 차에 넣고, 나쓰시오바라로 갔죠. 운이 좋았어요. 

둘째 딸이 있는 도쿄로 와 터를 잡은 다카다 씨. 이곳 시영아파트에 총 8가구의 피난민이 산다.

혼란속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20km 내 경계 구역에 도둑질이 너무 많아 위험한 지역이 되어 버렸죠. 도둑이 많아서 경찰도 가고 싶지 않아 했죠.

그래도 피난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 지진 때문에 길이 다 망가지고. 그런 혼란 속에서 무슨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조해서 다 같이 질서 지키며, 도망갔어요. 나는 그게 신기했어요. 일본 동북지방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동북지방 사람들이 대체로 말이 적고, 잘 참는 성격이긴 하지만 만약 문제가 생기고, 싸움이 나면 피난 가는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죠. 

도쿄에 와서 환경도 바뀌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요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TV 보고, 그냥 TV 보고, 하루 종일 지내요. 쓸쓸해요. 심심할 때는 빠찡고, 가라오케 가고 술 마시고. 빠찡고 일주일에 두 번, 가라오케 두 번, 술도 두 번. 매일 빠찡고, 가라오케 가거나 술 먹으면서 그렇게 지내는 거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너무 심심합니다. 

후쿠시마 나미에마치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데요

젊었을 때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농사를 지었죠. 감자, 콩, 옥수수 등 야채 농사로 약 1천 평 밭농사 지었죠. 집도 100평으로 넓었어요. 먼저 하늘로 간 나의 아내는 미용사였는데, 내 딸도 미용사죠. 집과 미용실이 같이 있었어요. 시골 큰 집에서 살던 아이들은 좁은 집에서 사니까 불편하다며 돌아가고 싶다고 하죠. 왜 작은 집으로 이사 왔냐며(웃음).

한 음식점에서 만난 뒤 돌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쓸쓸하다"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돌아갈 수 있을까? 30년 뒤면 난 하늘나라
아무 전망 없이 여기에... “원전 절대 안 돼”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7)] 후쿠시마 원전 7km 피난민 (2)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불과 7km 떨어진 나미에마치에 살다 피난 온 다카다(78세) 씨가 그나마 가설주택이 아닌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어 쫓겨날 위기는 면했다고 한숨을 쉰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그랬고, 재해 법률상 피난민들은 입거한 날부터 2년까지만 가설주택에서 살 수 있다. 다카다 씨는 “둘째 딸이 이곳으로 오라고 해 운이 좋아 안정적으로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설주택에 살고 있다”며 “그들은 마음속에 답답함과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돌아갈 수 없는 땅, 지진 해일 피해와 원전 사고로 피난 지역인 후쿠시마 원전 20km 경계안 사람들은 일본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있다. 정부는 사고 이전 20km 내 거주하고 있던 인구 약 7만8천2백명 중, 사고 이후 작년 4월 22일 10개 지역에서 약 8만5천명이 대피하고 있고, 그 중 어린이가 약 6천명이라고 발표했다. 

도쿄 가와사키시 다카츠구에 위치한 시영아파트(총 5개 동)에 살고 있는 피난민은 8가구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타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라 서로 잘 모른다. 그는 나미에마치에 살던 이웃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전화로 안부만 확인한다고 했다. 

3월 11일을 회상하던 다카다 씨는 쉬지 않고 전쟁 같던 시간을 풀어냈다. 그는 딸 부부와 손자, 손녀와 함께 도쿄로 향했다. 

[사진총괄 : 도영, 정재은]

“일본 정부가 나서서 탈핵해야... 원전만은 절대 안 돼”
초등학교 손자, 손녀 원전 얘기 하면 말도 못 꺼내게 해
손녀딸의 갑상선 피폭이 걱정이다


3.11 원전 폭발 뒤 방사능 공포와 핵발전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었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불과 7km 떨어져 산 주민으로서 어떤가

방사능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탈핵해야 해요. 경제도 중요하지만 핵발전만은 안 된요. 그런 운동이 필요합니다. 원전의 문제점은 모두 다 알게 됐죠. 원전만은 절대 안 돼요.

사고 전 나미에마치 살 때도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나

없었어요. 원전 가까이에 사는 사람에게는 전력회사에서 지원금이 많이 나오죠. 일자리도 생기고. 그때는 두렵지는 않았죠.

이번 사고를 겪으면 다카다 씨뿐만 아니라 손녀, 손자도 정신적 피해가 상당할 것 같아요

내가 2차 세계대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당시 전쟁 때 비행기 폭탄 투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어요. 지진 쓰나미는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손자, 손녀에게 무서운 기억으로 계속 남을 거예요. 손자, 손녀는 원전 얘기하면 “그런 얘기 하지 마라”, “듣고 싶지 않다”며 얘기도 못 꺼내게 해요. 그 정도로 심리적 충격이 큰 듯해요.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손녀의 행동에서 당시 충격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건강도 걱정일 텐데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글에서 나미에마치서 피난 왔는데, 손녀딸의 갑상선 피폭이 걱정이라고 했죠. 이이다떼무라, 가와마타마치로 일주일동안 피난했고, 여기는 핫스팟이죠. 멀리 피난가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죠. 

최근 체르노빌이 원전 사고에 관한 기사로 아이들의 갑상선암, 심장 장애, 유전자 변위 등에 관한 글을 읽었어요. 실제가 알고 싶어서 ‘체르노빌의 심장’이라는 영화를 봤죠. 여기서 작업원이 1만3천명이 사망했고, 콘크리트로 덮었다. 사고 이후 30년 지나 콘크리트는 부식되어서 비가 안으로 들어가고, 물이 새고. 그 물이 땅에 스며들고, 엄청난 방사능이 계속 유출되고 있다고 해요. 현장에서 200킬로미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높은 수치의 세슘이 측정되고, 많은 병이 생기고 있다고 해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는데, 그거 보고 우리 손녀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지 너무 걱정이에요. 

다카다 씨 건강은요?

스트레스 때문인지 후쿠시마에서 살 때는 병원에 간 적이 없는데, 여기 와서 두 번이나 병원에 갔죠. 몸이 조금 안 좋아요. 사위가 일자리는 찾고 있는데 좋은 일자리가 없죠. 요즘에 그렇게 사니까 아무래도 몸이 약해진 것 같아요. 

다카다 씨

후쿠시마 사람들, 돈 없고, 일자리 없고, 수입 없고...
“지금 아무 전망 없이 여기 있는 거죠”
원전으로부터 20km? 의미 없는 구별


피난 지원금은 좀 받았나요?

여러 단체와 정부, 지차체 등에서 한 사람당 20만엔(한화 274만원 가량)씩 5명이니까 120만엔 받았어요. 후쿠시마 동네 사람들은 생계가 너무 어려운 사람이 있어요. 왜냐면 지진 때문에 많은 빚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죠. 주택 대출 빚도 있는데, 그런 빚도 갚아야 하니까요. 

여기 집에 와서 보이듯이, 냉장고 2대, TV 2대, 냉온풍기 2대, 전자레인지도 2대. 적십자 등 지원 물품으로 받았어요. 왜 이렇게 많이 주냐고, 불필요하다며 거절하기도 했죠.

도쿄전력에서의 보상은요?

보상할 수 있겠지만 그거야 도쿄전력과 협상하고 결정하는 것이지. 근데 지금 가지고 있는 빚은 어쨌든 갚아야 하는 빚이죠. 그것을 갚아야 하는데,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수입도 없는 상태로 너무 힘든 사람들이 많아요.

지진 보험도 있는데, 후쿠시마 동네 사람들은 지진 보험에 별로 가입하지 않아요. 지진 때문에 피해가 많지만 보험으로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죠. 혹시 보험 가입됐던 사람도 집이 어느 정도 무너졌는지에 따라 보험금이 달라요. 전파냐 반파에 따라. 그래도 50%정도 밖에 보상이 안 돼 어떻게 사냐고 하면 보험회사들은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죠. 

피난민 생계 문제가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어렵죠. 정부의 피난 비용 지원과 도쿄전력에서 받는 보상금도 있지만. 어떻게든 여기서 살고 있는데, 앞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고... 사위가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어려워요. 그래도 어쨌든 돌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자리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지금 아무 전망 없이 여기 있는 거죠. 아마 계속 그런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좋은 일자리 찾을 수 있다면 여기서 계속 생활하게 될 것 같고. 

계획 피난 지역인 원전으로부터 20km 안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 밖 지역 거주자. 방사능이란 게 20km 안쪽만 오염시키는 게 아니잖아요. 그 가운데 차별이 또 발생하는 것 같아요

피난 지역 경계로 20km 이내에 거주하냐, 아니냐 하는 구별은 별로 의미가 없어요. 똑같이 지진 쓰나미 피해당하고, 방사능도 똑같이 나오는데... 20km 안팎의 차별이 있는 건 안타까운 일이예요. 그래도 오늘 신문 보니까, 20km 경계 구역 밖 사람들에게도 미흡하지만 보상금이나 대책이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돌아갈 수 있을까? 30년 뒤 나는 하늘나라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들 생활이 우선
노인들 모여 들판서 치던 파크 골프 그리워


후쿠시마 나미에마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3월까지 정부가 방침이 결정하는데, 방사능 폐기물 중간처리시설을 만든다고 하는데. 절대 안 된다. 아마도 정부를 이미 결정했을 지도 몰라요. 20km, 10km, 0km든 방사능이 너무 많은데 누가 돌아오겠는가. 중간처리 시설은, 각 지에서 생긴 쓰레기들이 방사능 오염되었기 때문에 아무데나 버리면 안 되니까 쓰레기를 임시적으로 보관하는 곳이라고 해요. 임시적이라도 해도 30여년 정도는 보관해야 하고. 30년 뒤라면 나는 아마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을까. 그거 생기면 어떻게 돌아가나...

아무래도 못 돌아갈 것 같아요. 돌아가고 싶지만 사실상 무리라고 생각해요. 돌아가고 싶기는 하지만... 손녀는 항상 돌아가고 싶다고 하죠. 무리예요. 후쿠시마 원전에서 7km 떨어진 집은 수리하면 살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방사능이 심해서 못 돌아가겠죠. 

손녀딸이 후쿠시마에서 배구 선수였는데, 도쿄로 와서 학교서 배구 클럽 활동을 한다고 한다. 손녀는 지진 재해와 관련해 글짓기를 해서 상을 받았다. 다카다 씨가 살고 있는 시영아파트 거실 중앙에 상장이 붙어있다. 

그럼 도쿄 가와사키시에서 계속 살아갈 수도 있겠네요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다른 장소도 없고, 갈 때도 없고. 또, 아이들이 여기서 학교 다니고, 친구도 생겼고. 간단히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없죠. 일거리는 그 다음이고, 아이들 생활이 우선이죠. 때문에 아버지는 후쿠시마에 남아서 아이들 먼저 피난시키는 그런 집도 많아요. 아마 우리 가족은 모두 여기 시영아파트에서 살 것 같아요.

나의 경우는 구청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야마모토 씨를 만나고 처음 여기 와서 얘기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야마모토와 만난 이후에 나는 빠르게 적응하고 살 수 있게 됐어요. 너무 고마운 사람이죠. 

고향 생각하면 그리운 것은?

파크 골프예요. 보통 골프와 비슷한데 전용 골프장에서 치는 게 아니고, 들판 등 자연 속에서 치는 거죠. 후쿠시마 노인들이 많이 했는데,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일주일 한 번, 이 주일에 한 번씩 했죠. 할아버지 지역에서 모이는데, 많이 모일 때는 200명 정도 모이고 대회도 하죠. 여기 도시에서는 할 수 없죠. 

그게 너무 하고 싶어요. 진짜 골프는 힘들지만, 우리같이 나이 많은 사람한테는 파크 골프가 제일 좋아요. 게이트볼은 시골 노인들이 예전에는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싫어요. 오래된 느낌도 들고, 조금 촌스럽기도 하고. 아무튼 싫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취재진에게 집도 공개하고,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지진 피해 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나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인터뷰에 나섰어요. 한국이든 일본이든 나의 이야기가 필요하면 해야죠. 

다카다 씨와 딸 부부,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손자, 손녀가 함께 살고 있는 시영주택. 사진 왼쪽에 파크 골프채 가방이 보인다. 다카다 씨는 전용 골프장이 아닌 너른 들판서 동료 노인들과 쳤던 파크 골프가 그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