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원전피해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전무합니다. 또한 일본 국민들의 원전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보도도 간헐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MB는 핵안보를 위한 정상회의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유수의 우리나라 언론이 꺼려하는 일본 원전사태를 심층 취재하기 위해 일개 인터넷언론 기자가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피폭에 대한 우려, 숙소와 언어 등의 장벽을 뒤로 하고 홀홀 단신 일본으로 건너간 정재은 미디어충청 기자의 글을 블로그로 옮겨왔습니다. 원문은 아래를 누르시면 볼수 있습니다.
미디어충청 www.cmedia.or.k
원전 20km 붉은 불빛 지나 나오는 노동자들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8)] 후쿠시마 (2)
후쿠시마시내에서 이와키시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2.02마이크로시버트(mSv/h)의 높은 방사능 수치가 측정된다. 공간 방사능 수치는 계속 이 수준을 넘나들었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35km 가량 떨어진 해안 작은 마을 요쓰쿠라마치서 J빌리지로 향하는 길, 원전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차량이 줄지어 나온다.
가는 길목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눈에 띤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혼자였고, 가끔 우동집에서 둘이 저녁을 먹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특히 다른 곳과 다르게 원전 인근 마을 편의점에는 여러 개의 분진 마스크가 판매되고 있었다.
방호복도 입지 않은 경계구역 경찰 “감기 걸려 마스크 착용했다”
원전에 투입되는 비정규직...“2, 3차 하청구조가 아닌 18차 다단계까지”
제1원전으로 들어가는 J빌리지 앞은 경찰과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의 철저한 통제로 막혀 있다. 붉은 불빛이 맴돌고, 경계가 삼엄하다.
경비서는 경찰들은 방사능 수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방호복조차 입지 않고 있다. 일반 마스크를 쓴 사람도 있고, 안 쓴 사람도 있다. 장화 착용 역시 마찬가지다. 경찰관들의 방사능 피폭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취재진이 마스크 착용에 대해 질문하자 한 경찰관은 당황하며 “감기에 걸려서 마스크를 착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경찰에게 출신을 묻자 “아이치현에서 왔다”고 말해, 일본 전역에서 경찰을 투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계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서는 노동자들은 제1원전에 하루 3천여 명이 투입되고 있다. J빌리지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20㎞ 떨어진 사고 수습 전진기지로, 모두 남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J빌리지에서 출퇴근하며, 주로 사고 원전 주변의 쓰나미 잔해 처리와 오염 제거 작업 등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얼굴 없는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 작업복을 입고 차로 출퇴근하며 혼자 뚜벅 뚜벅 편의점으로 걸어가는 그들은 마치 강시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이주, 일용직 노동자가 대다수라 ‘원전 집시’라 불리기도 한다.
또, 하청에 하청 구조로 원청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조차 힘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전노련 세라마 테이지 정책실장은 “다단계 하청구조인데, 상담 해 왔던 한 노동자는 18차 다단계였다. 2, 3차 수준이 아니었다”며 “종합 건설 회사 그 밑, 그 밑으로 계속 내려가고, 누가 기업주인지 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청 노동자 구조에 “조폭들과 관련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노동이다 보니 직접 스스로 원전에 와서 일하겠다는 노동자들이 많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며 “그렇기 때문에 빈곤층이 사는 동네에 조폭들이 가서 신용불량자 등을 끌고 와서 차량에 태워 원전에서 일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일례로 그에 의하면, 80년대 타 원자력 발전소에서 전국 최초의 핵발전소 일용직노동자노조가 결성되었는데, 노조 결성 뒤 조폭 등이 동원되어 노조를 파괴했다.
피폭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생명 위협
노동자 피폭과 희생으로 유지돼도 가려진 삶
다른 비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다 보니 이들은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한다. 일본 원자력안전보안청에 의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도쿄전력 직원에 비해 16배나 높은 피폭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정부는 작년 3월 15일 비상상태에 남성 핵발전소노동자의 한 해 동안 피폭한계치를 100밀리시버트(mSv)에서 250밀리시버트로 높게 책정하기도 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배관 전문 현장감독으로 수십 년간 일했으며, 지난 1997년 1월 암으로 사망한 고인 히라이 씨에 글에 의하면 원전에서 일할 때 노동자들은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알람 메타를 갖고 들어가는데, 알람이 울리면 당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1분 1초를 다투는 곳이다.
그는 “원전에는 방사능 피폭 문제가 있기 때문에, 후계자를 양성하기가 쉽지 않다”며 “원전의 작업 현장은 어둡고 더우며, 보호 마스크도 쓰고 있어서, 상호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려운 곳이라서, 손짓발짓을 이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그는 “예를 들어, 용접 전문 기술자라면 눈이 쉬 약해진다. 30세를 넘기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없게 된다”며 “그렇게 되면, 세밀한 작업이 많은 정유 공장 등에서는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일당이 낮더라도, 원전이라도 갈까라고 하는 식이 되어버린다”고 적었다.
원전운영사 텝코는 예를 들어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오사카의 카마가사키 같은 곳에서 노숙자나 실직자를 대상으로 인력을 구했다.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투입지역이나 위험들에 대해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고 언론을 통해 폭로된 바 있다.
사실상 원자력발전, 그리고 정부의 노동정책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생명의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올해 2월 말,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직후 복구공사에 투입됐다가 숨진 노동자에 대해 처음으로 ‘과로사’ 판정을 했지만, 드문 경우이다. 더욱이 피폭으로 인한 산업재해 인정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원전이 노동자들의 피폭과 희생으로 유지, 복구되고 있지만 이들의 노동 환경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본 노조, 환경단체 등도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원전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은 이와키 곳곳 온천장이나 모텔에서 잠을 자고 있다. 이와키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 모 씨는 “노동자들은 3교대를 하기 때문에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쉬고 있고, 온천장이나 모텔에서 머물고, 이곳 선술집에서 술 한 잔 씩 하며 숙소로 돌아간다”며 “이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다. 아마도 도쿄전력 등 회사측에서 관리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와키 역 인근 술집 앞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서성인다. 베일에 싸인 노동자들이 침묵하는 거리엔 기타를 맨 가수의 처량한 노랫소리만 울려 퍼진다.
* 통역 : 일본노동넷 야스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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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총괄 : 도영, 정재은] |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로부터 35km 가량 떨어진 해안 작은 마을 요쓰쿠라마치서 J빌리지로 향하는 길, 원전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차량이 줄지어 나온다.
가는 길목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눈에 띤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혼자였고, 가끔 우동집에서 둘이 저녁을 먹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특히 다른 곳과 다르게 원전 인근 마을 편의점에는 여러 개의 분진 마스크가 판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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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복도 입지 않은 경계구역 경찰 “감기 걸려 마스크 착용했다”
원전에 투입되는 비정규직...“2, 3차 하청구조가 아닌 18차 다단계까지”
제1원전으로 들어가는 J빌리지 앞은 경찰과 용역경비업체 직원들의 철저한 통제로 막혀 있다. 붉은 불빛이 맴돌고, 경계가 삼엄하다.
경비서는 경찰들은 방사능 수치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방호복조차 입지 않고 있다. 일반 마스크를 쓴 사람도 있고, 안 쓴 사람도 있다. 장화 착용 역시 마찬가지다. 경찰관들의 방사능 피폭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취재진이 마스크 착용에 대해 질문하자 한 경찰관은 당황하며 “감기에 걸려서 마스크를 착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경찰에게 출신을 묻자 “아이치현에서 왔다”고 말해, 일본 전역에서 경찰을 투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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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서는 노동자들은 제1원전에 하루 3천여 명이 투입되고 있다. J빌리지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20㎞ 떨어진 사고 수습 전진기지로, 모두 남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J빌리지에서 출퇴근하며, 주로 사고 원전 주변의 쓰나미 잔해 처리와 오염 제거 작업 등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얼굴 없는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 작업복을 입고 차로 출퇴근하며 혼자 뚜벅 뚜벅 편의점으로 걸어가는 그들은 마치 강시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이주, 일용직 노동자가 대다수라 ‘원전 집시’라 불리기도 한다.
또, 하청에 하청 구조로 원청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조차 힘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전노련 세라마 테이지 정책실장은 “다단계 하청구조인데, 상담 해 왔던 한 노동자는 18차 다단계였다. 2, 3차 수준이 아니었다”며 “종합 건설 회사 그 밑, 그 밑으로 계속 내려가고, 누가 기업주인지 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청 노동자 구조에 “조폭들과 관련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노동이다 보니 직접 스스로 원전에 와서 일하겠다는 노동자들이 많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며 “그렇기 때문에 빈곤층이 사는 동네에 조폭들이 가서 신용불량자 등을 끌고 와서 차량에 태워 원전에서 일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일례로 그에 의하면, 80년대 타 원자력 발전소에서 전국 최초의 핵발전소 일용직노동자노조가 결성되었는데, 노조 결성 뒤 조폭 등이 동원되어 노조를 파괴했다.
피폭 무릅쓰고 일하는 노동자...생명 위협
노동자 피폭과 희생으로 유지돼도 가려진 삶
다른 비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다 보니 이들은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한다. 일본 원자력안전보안청에 의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도쿄전력 직원에 비해 16배나 높은 피폭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정부는 작년 3월 15일 비상상태에 남성 핵발전소노동자의 한 해 동안 피폭한계치를 100밀리시버트(mSv)에서 250밀리시버트로 높게 책정하기도 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배관 전문 현장감독으로 수십 년간 일했으며, 지난 1997년 1월 암으로 사망한 고인 히라이 씨에 글에 의하면 원전에서 일할 때 노동자들은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알람 메타를 갖고 들어가는데, 알람이 울리면 당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1분 1초를 다투는 곳이다.
그는 “원전에는 방사능 피폭 문제가 있기 때문에, 후계자를 양성하기가 쉽지 않다”며 “원전의 작업 현장은 어둡고 더우며, 보호 마스크도 쓰고 있어서, 상호간에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려운 곳이라서, 손짓발짓을 이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그는 “예를 들어, 용접 전문 기술자라면 눈이 쉬 약해진다. 30세를 넘기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없게 된다”며 “그렇게 되면, 세밀한 작업이 많은 정유 공장 등에서는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일당이 낮더라도, 원전이라도 갈까라고 하는 식이 되어버린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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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빌리지 입구, 20km 경계구역 |
원전운영사 텝코는 예를 들어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오사카의 카마가사키 같은 곳에서 노숙자나 실직자를 대상으로 인력을 구했다. 이렇게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투입지역이나 위험들에 대해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고 언론을 통해 폭로된 바 있다.
사실상 원자력발전, 그리고 정부의 노동정책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생명의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올해 2월 말,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직후 복구공사에 투입됐다가 숨진 노동자에 대해 처음으로 ‘과로사’ 판정을 했지만, 드문 경우이다. 더욱이 피폭으로 인한 산업재해 인정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원전이 노동자들의 피폭과 희생으로 유지, 복구되고 있지만 이들의 노동 환경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본 노조, 환경단체 등도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원전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은 이와키 곳곳 온천장이나 모텔에서 잠을 자고 있다. 이와키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 모 씨는 “노동자들은 3교대를 하기 때문에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쉬고 있고, 온천장이나 모텔에서 머물고, 이곳 선술집에서 술 한 잔 씩 하며 숙소로 돌아간다”며 “이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다. 아마도 도쿄전력 등 회사측에서 관리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와키 역 인근 술집 앞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서성인다. 베일에 싸인 노동자들이 침묵하는 거리엔 기타를 맨 가수의 처량한 노랫소리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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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역 : 일본노동넷 야스다 씨
“원전은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다”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9)] 피폭노동 파헤치는 나스비
나스비(가명, 47세) 씨는 피폭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나스비는 때론 피폭노동자 지원 모임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도쿄 빈곤지역인 산야의 노동자 복지 회관에서 일하는 그는 오랜 기간 빈곤층인 일용직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과 피폭노동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활동을 해 왔다.
그는 일용직노동자와 원전산업노동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원전산업 노동자 중 70% 가량이 지역민이고, 30% 가량이 전국에서 모인 일용직노동자라고 추정했다. 방사능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후쿠시마 원전에는 지난 1년 동안 연인원 84만명 정도가 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원전산업은 명백하게 빈곤과 차별을 배경으로 굴러간다”며 “때문에 나는 요즘 어딜 가나 원전은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원전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인터뷰를 하던 그는 “지난해 반핵아시아 모임에서 피폭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국은 피폭 노동에 대해 논의되거나, 이슈 되지 않는 것 같다. 또, 비파괴검사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스비 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중층하청구조에 시달리는 ‘일회용 노동자’
임금 착취, 고용조건 악화...애매한 고용관계서 비롯
도쿄전력 3차 하청까지만 인정, 전력회사만 이득 봐
조폭 연류... 폭력적인 구조에서 노동자 목소리 내지 못 해
원전산업은 중층하청구조로 알려져 있다. 최대 18차까지 있다고 하던데
우리는 ‘유령 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데, 유령 노동자는 일본의 경우 특히 건설노동자가 많다. 건설산업의 경우 중층하청구조이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일제 강점기 일본의 고용 구조가 한국에 들어가면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원청 아래 하청, 재하청 등 밑으로 계속 내려가는데, 가장 밑바닥에는 가장 나쁜 노동조건으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원전산업도 똑같이 중층하청구조이다. 발주회사는 전력회사이고, 원전 건설, 시공사 등은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등과 같은 대기업과 플랜트 건설 회사이다. 이 가운데 내가 확인한 경우는 7~8차 다단계하청이다. 하청, 재하청이 되면서 노동자들이 중간에서 임금을 착취당하고, 노동조건이 더 악화된다. 고용관계가 명백하지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누가 고용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하는 건데, 후쿠시마 원전 도쿄전력이 책임 회피하기 쉬운 구조로 볼 수 있겠다
원청은 하청 구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도쿄전력이 인정하는 것은 3차까지이다. 노동자들은 후쿠시마 원전에 3차 하청직원으로 원전 현장에 들어간다. 고용관계가 위장되는 것이다. 누가 고용주인지도 모르는 애매한 하청구조는 전력회사에게만 좋은 것이다. 노동자는 피폭되면 일하지 못한다. 일회용 노동자이니까.
원전에서 일하는 일용직노동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지역민이 70% 가량, 나머지 30% 가량이 오카사시의 가마가사키와 같은 빈곤 지역에서 온 노숙자, 일용직노동자들로 추정하고 있다. 빚 때문에 조폭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원전에 일하러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피폭노동에 대해 얘기하면 중층하청 구조와 동시에 조폭이 관련되어 있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왜 조폭들이 관계되어 있냐면, 하청 구조의 제일 밑, 그러니까 빈곤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게 조폭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구조 때문에 제일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원전 노동은 피폭을 전제로 하는 일
깨끗한 실내만 보여주고 원전은 깨끗한 곳이라고 속여
낙후 지역 노려 원전 유치...화려한 건물 아닌 제대로 된 일자리 절실
3.11 사고 이후 피폭노동자 문제가 조금씩 부각되고 있다. 다른 일자리도 어렵지만, 원전에서 일한다는 게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거 아닌가
도쿄전력 직원들은 콘트롤룸 등 안전한 장소에서 일하고, 전력 회사들은 국민에게 원전 안의 깨끗한 실내만 보여준다. 원전은 깨끗하지 않은데, 깨끗하고 좋은 직장이라고 선전한다. 현장 노동자들은 방호복 입고, 마스크 쓰고, 방사선 공포에서 일하고 있다. 심한 경우는 1~2분 정도밖에 일하지 못한다.
회사측은 공식적인 방사능 피폭 선량 기록을 남길 의무가 있다. 기록도 제대로 남지 않지만, 공식적인 기록에 의해서도 피폭노동자 중 97%가 하청 일용직노동자이다.
피폭 선량 기록이 조작된다는 의혹도 깊던데
노동자의 피폭 선량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법적 피폭 기준치를 넘으면 일하지 못하니까 일정 정도 피폭되면 알람 메타 측정기를 꺼버린 상태에서 일한다. 피폭 선량 기록도 노동자가 직접 하지 않고 전력회사가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라고 보기 어렵다.
과거 81년 딱 한번 만들어졌던, 원전 하청노동자노조 당시 서기장은, 피폭 수치 기록을 봤는데, 자신이 가지도 않았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 병원의 도장도 찍혀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피폭노동자를 지원하는 정부의 정책이나 구조가 없는 것이다.
원전 하청노동자의 임금은 어느 정도인가
원전 노동은 피폭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을 해도 하루에 임금 1만엔(약 13만6천원), 낮은 경우 8천엔(약 11만원)을 받는다. 물론 아무런 사회보장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원전 하청노동자의 경우 고용계약서 없이 일하는 경우도 많다. 일자리 중 제일 말도 안 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것이 원전 노동자이다.
나스비의 추정에 의하면 지역민의 상당수가 원전에서 일하는 것인데, 원전 건설의 근거가 지역민의 일자리 창출이었겠다. 원전 건설 뒤 지역 경제구조와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테고
실제로 어떤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지 전력회사는 밝히지 않는다. 원전에 있는 지역은 알다시피 좋은 일자리가 없는 낙후된 지역이다. 일자리 때문에 원전이 필요하다고 선전하고, 전력회사와 정부가 그런 빈곤 지역 노려서 원전을 유치한다. 후쿠시마 제1원전 하마도리 지역의 경우 농업조차 할 수 없는 지역이다. 가까이에 있는 나미에마치 지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절반 이상이 원전에 취직한다. 절반 이상은, 원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일이다. 전기공, 배관공 등도 포함된다.
이시마르 씨라는 사람은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 후타바마치 사는 사람인데, 원전이 건설되기 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원전 건설 이전에 동네 남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대부분 도시로 갔다. 원전이 건설되고 남자들이 도시에서 돌아와 집에서 직장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수많은 가장들은 설날 이외에 집에 못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집의 가족들은 원전 덕분에 아버지하고 같이 지낼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단다. 지역민들은 화려한 건물, 체육관, 구청청사 등을 원하기보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절실했다.
여러모로 원전은 명백하게 빈곤과 차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어디에 가나 원전은 차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일본 원전 가동 이후 피폭노동 산재 처리 단 10건”
‘일회용 노동자’란 이유로 산재 인정 안 되기도
피폭노동에 의한 산업재해 처리는 어느 정도인가
일본에서 원전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역사적으로 피폭노동이 산업재해로 처리된 적은 지금까지 10명밖에 없다. 일회용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병이 피폭 때문이지, 아닌지 증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9년 9월 30일 이바라키현의 토우카이무라의 주식회사 제이시오 토우카이사무소에서 ‘JCO임계사고’로 3명의 노동자가 대량의 중성자선 등을 피폭하게 된 사고가 있었다. 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전환시험동에서 3명의 노동자가 질산우라늄 제조 중, 돌연 푸른 섬광과 함께 감마선 검출 모니터가 위험을 알리고, 임계사고(임계란 핵분열반응이 원자로 내부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계속되어지는 상태이다 -편집자 주)가 발생했다. 핵분열 연쇄반응 상태가 20시간가량 계속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있던 2명의 노동자가 최종 20시버트(Sv) 피폭으로 방사선피폭에 의한 대장기의 기능부전 등으로 사망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임계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고를 수습했던 사람, 구급대원 등 5명도 50밀리시버트(mSv), 최대 120밀리시버트 피폭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인과관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이외에 원전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해서 정부와 전력회사는 일한 지 몇 년이 지나서 병에 걸렸으므로 원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산재로 인정되는 병의 종류는 너무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원폭 피해자에 비해 원전 피폭 노동자들은 인정되는 병의 종류가 더 한정적이다.
트럭기사 모집한다고 해 갔더니 후쿠시마 원전 배관일
“노동운동, 시민운동...피폭노동 심각성 인식하기 시작”
98년, ‘원전에서 일하지 말자’ 캠페인...원전 하청노동자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가
우리는 노동 상담을 통해서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노조를 만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숫자는 적지만 산재 인정을 위해 재판 중인 사람과 지원자가 함께 하는 네트워크이다.
노동자들에게 자료를 나누어주는데, 원전 하청노동자들은 대부분 피폭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하청노동자들은 고용조건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모집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트럭기사를 모집한다고 해 갔더니 후쿠시마 원전안에서 배관일을 시켰다. 이런 경우는 다반사이다.
우리는 피폭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만들었는데,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자료를 보고 여러 노조들이 피폭 노동에 대해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피폭노동자는 노동운동에서조차 무시당해왔다. 노동운동이 반핵운동을 하긴 하지만, 시민운동이 하는 반핵운동을 같이 했지 노조가 독자적으로 반핵운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피폭노동자를 상담하고, 이 때문에 노동쟁의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용직노동자 운동을 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피폭노동자와 함께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목소리를 여러 노조에서 들으려고 하고 있다. 일용직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노조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고 있다. 3월 10일 열리는 집회도 일용직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노조들이 함께 한다.
자료의 또 하나의 효과는 시민운동도 피폭노동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우리 자료를 보고 피폭노동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피폭노동 문제는, 아까 말했다시피 차별과 빈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노동운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반핵을 외치는 시민운동과도 적극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11 사고 이전에도 피폭노동 문제에 집중했나
3.11 사고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1998년에 빈곤 지역인 오사카 가마가사키, 나고야 사사시마, 요코하마 코토부키, 도쿄 산야에서 원전에 일하러 가지 말라고 선전물을 만들어 나눠줬다. 1997년 후쿠시마 원전에서 위험한 일을 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모집했는데, 그런 위험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일자리 없는데, 일하러 가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반응하기도 했다. 그런 반응은 가난한 일용직노동자들의 솔직한 목소리였다. 일자리가 없어서 생활이 어려운데, 일자리가 있으면 어떤 일을 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사업주에게 원전 안에서 어떤 일을 하냐고 질문 받으면 절대 대답하지 말라고 지시받기 때문에 우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98년 ‘원전에 가지 말자’ 캠페인에서 우연히 원전에서 일했던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쉽게 말하지 않았고, 우리를 믿게 되니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는 원전에서 걸레와 수건을 가지고 오염 처리 일을 했다. 그 사람은 도카이 원전에서 한 달 동안 일하다 그만 뒀다. 그의 동료는 같은 원전에서 1년 동안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 사망한 노동자는 회사에서 피폭 기록을 주지 않아 얼마나 피폭됐는지 알 수 없었고, 산재 처리도 못하고 죽었다.
원전 하청노동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가고 있다. 가끔 지역에 가서 원전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소식을 물으면, 노조 관계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백혈병으로 죽었어”라고 말한다. 피폭노동자의 사망에 대해 무감각하고, 보통 발생하는 병에 걸렸다 죽었다고 치부하는 것에 나는 굉장히 놀랐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일용직노동자와 원전산업노동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원전산업 노동자 중 70% 가량이 지역민이고, 30% 가량이 전국에서 모인 일용직노동자라고 추정했다. 방사능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후쿠시마 원전에는 지난 1년 동안 연인원 84만명 정도가 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원전산업은 명백하게 빈곤과 차별을 배경으로 굴러간다”며 “때문에 나는 요즘 어딜 가나 원전은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원전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인터뷰를 하던 그는 “지난해 반핵아시아 모임에서 피폭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국은 피폭 노동에 대해 논의되거나, 이슈 되지 않는 것 같다. 또, 비파괴검사도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스비 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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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비 (가운데) 씨. [사진총괄 : 도영, 정재은] |
중층하청구조에 시달리는 ‘일회용 노동자’
임금 착취, 고용조건 악화...애매한 고용관계서 비롯
도쿄전력 3차 하청까지만 인정, 전력회사만 이득 봐
조폭 연류... 폭력적인 구조에서 노동자 목소리 내지 못 해
원전산업은 중층하청구조로 알려져 있다. 최대 18차까지 있다고 하던데
우리는 ‘유령 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데, 유령 노동자는 일본의 경우 특히 건설노동자가 많다. 건설산업의 경우 중층하청구조이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일제 강점기 일본의 고용 구조가 한국에 들어가면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원청 아래 하청, 재하청 등 밑으로 계속 내려가는데, 가장 밑바닥에는 가장 나쁜 노동조건으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원전산업도 똑같이 중층하청구조이다. 발주회사는 전력회사이고, 원전 건설, 시공사 등은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 등과 같은 대기업과 플랜트 건설 회사이다. 이 가운데 내가 확인한 경우는 7~8차 다단계하청이다. 하청, 재하청이 되면서 노동자들이 중간에서 임금을 착취당하고, 노동조건이 더 악화된다. 고용관계가 명백하지 않은 애매한 상태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누가 고용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하는 건데, 후쿠시마 원전 도쿄전력이 책임 회피하기 쉬운 구조로 볼 수 있겠다
원청은 하청 구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도쿄전력이 인정하는 것은 3차까지이다. 노동자들은 후쿠시마 원전에 3차 하청직원으로 원전 현장에 들어간다. 고용관계가 위장되는 것이다. 누가 고용주인지도 모르는 애매한 하청구조는 전력회사에게만 좋은 것이다. 노동자는 피폭되면 일하지 못한다. 일회용 노동자이니까.
원전에서 일하는 일용직노동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지역민이 70% 가량, 나머지 30% 가량이 오카사시의 가마가사키와 같은 빈곤 지역에서 온 노숙자, 일용직노동자들로 추정하고 있다. 빚 때문에 조폭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원전에 일하러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피폭노동에 대해 얘기하면 중층하청 구조와 동시에 조폭이 관련되어 있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왜 조폭들이 관계되어 있냐면, 하청 구조의 제일 밑, 그러니까 빈곤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게 조폭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구조 때문에 제일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도쿄 빈곤지역 산야와 인접한 다떼가와. 다떼가와 하천 재정비 이유로 철거민, 노숙자들을 쫓아내자 이들이 투쟁하고 있다. 빈곤지역에 머무는 일용직노동자들 대다수가 원전에 일하러 가거나 빚에 허덕여 사실상 끌려가기도 한다. |
원전 노동은 피폭을 전제로 하는 일
깨끗한 실내만 보여주고 원전은 깨끗한 곳이라고 속여
낙후 지역 노려 원전 유치...화려한 건물 아닌 제대로 된 일자리 절실
3.11 사고 이후 피폭노동자 문제가 조금씩 부각되고 있다. 다른 일자리도 어렵지만, 원전에서 일한다는 게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거 아닌가
도쿄전력 직원들은 콘트롤룸 등 안전한 장소에서 일하고, 전력 회사들은 국민에게 원전 안의 깨끗한 실내만 보여준다. 원전은 깨끗하지 않은데, 깨끗하고 좋은 직장이라고 선전한다. 현장 노동자들은 방호복 입고, 마스크 쓰고, 방사선 공포에서 일하고 있다. 심한 경우는 1~2분 정도밖에 일하지 못한다.
회사측은 공식적인 방사능 피폭 선량 기록을 남길 의무가 있다. 기록도 제대로 남지 않지만, 공식적인 기록에 의해서도 피폭노동자 중 97%가 하청 일용직노동자이다.
피폭 선량 기록이 조작된다는 의혹도 깊던데
노동자의 피폭 선량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법적 피폭 기준치를 넘으면 일하지 못하니까 일정 정도 피폭되면 알람 메타 측정기를 꺼버린 상태에서 일한다. 피폭 선량 기록도 노동자가 직접 하지 않고 전력회사가 기록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이라고 보기 어렵다.
과거 81년 딱 한번 만들어졌던, 원전 하청노동자노조 당시 서기장은, 피폭 수치 기록을 봤는데, 자신이 가지도 않았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 병원의 도장도 찍혀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피폭노동자를 지원하는 정부의 정책이나 구조가 없는 것이다.
원전 하청노동자의 임금은 어느 정도인가
원전 노동은 피폭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을 해도 하루에 임금 1만엔(약 13만6천원), 낮은 경우 8천엔(약 11만원)을 받는다. 물론 아무런 사회보장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원전 하청노동자의 경우 고용계약서 없이 일하는 경우도 많다. 일자리 중 제일 말도 안 되는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것이 원전 노동자이다.
나스비의 추정에 의하면 지역민의 상당수가 원전에서 일하는 것인데, 원전 건설의 근거가 지역민의 일자리 창출이었겠다. 원전 건설 뒤 지역 경제구조와 관계에 변화가 생겼을 테고
실제로 어떤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지 전력회사는 밝히지 않는다. 원전에 있는 지역은 알다시피 좋은 일자리가 없는 낙후된 지역이다. 일자리 때문에 원전이 필요하다고 선전하고, 전력회사와 정부가 그런 빈곤 지역 노려서 원전을 유치한다. 후쿠시마 제1원전 하마도리 지역의 경우 농업조차 할 수 없는 지역이다. 가까이에 있는 나미에마치 지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절반 이상이 원전에 취직한다. 절반 이상은, 원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일이다. 전기공, 배관공 등도 포함된다.
이시마르 씨라는 사람은 후쿠시마 제1원전 인근 후타바마치 사는 사람인데, 원전이 건설되기 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원전 건설 이전에 동네 남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대부분 도시로 갔다. 원전이 건설되고 남자들이 도시에서 돌아와 집에서 직장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수많은 가장들은 설날 이외에 집에 못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집의 가족들은 원전 덕분에 아버지하고 같이 지낼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단다. 지역민들은 화려한 건물, 체육관, 구청청사 등을 원하기보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절실했다.
여러모로 원전은 명백하게 빈곤과 차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어디에 가나 원전은 차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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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진 출처 : 구글 위성 캡쳐] |
“일본 원전 가동 이후 피폭노동 산재 처리 단 10건”
‘일회용 노동자’란 이유로 산재 인정 안 되기도
피폭노동에 의한 산업재해 처리는 어느 정도인가
일본에서 원전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역사적으로 피폭노동이 산업재해로 처리된 적은 지금까지 10명밖에 없다. 일회용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병이 피폭 때문이지, 아닌지 증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99년 9월 30일 이바라키현의 토우카이무라의 주식회사 제이시오 토우카이사무소에서 ‘JCO임계사고’로 3명의 노동자가 대량의 중성자선 등을 피폭하게 된 사고가 있었다. 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전환시험동에서 3명의 노동자가 질산우라늄 제조 중, 돌연 푸른 섬광과 함께 감마선 검출 모니터가 위험을 알리고, 임계사고(임계란 핵분열반응이 원자로 내부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계속되어지는 상태이다 -편집자 주)가 발생했다. 핵분열 연쇄반응 상태가 20시간가량 계속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있던 2명의 노동자가 최종 20시버트(Sv) 피폭으로 방사선피폭에 의한 대장기의 기능부전 등으로 사망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임계의 위험성에 대해 교육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사고를 수습했던 사람, 구급대원 등 5명도 50밀리시버트(mSv), 최대 120밀리시버트 피폭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경우 인과관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이외에 원전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해서 정부와 전력회사는 일한 지 몇 년이 지나서 병에 걸렸으므로 원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산재로 인정되는 병의 종류는 너무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원폭 피해자에 비해 원전 피폭 노동자들은 인정되는 병의 종류가 더 한정적이다.
트럭기사 모집한다고 해 갔더니 후쿠시마 원전 배관일
“노동운동, 시민운동...피폭노동 심각성 인식하기 시작”
98년, ‘원전에서 일하지 말자’ 캠페인...원전 하청노동자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가
우리는 노동 상담을 통해서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노조를 만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숫자는 적지만 산재 인정을 위해 재판 중인 사람과 지원자가 함께 하는 네트워크이다.
노동자들에게 자료를 나누어주는데, 원전 하청노동자들은 대부분 피폭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하청노동자들은 고용조건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모집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트럭기사를 모집한다고 해 갔더니 후쿠시마 원전안에서 배관일을 시켰다. 이런 경우는 다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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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에서 20km 떨어진 곳의 경계가 삼엄하다. |
우리는 피폭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만들었는데,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자료를 보고 여러 노조들이 피폭 노동에 대해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피폭노동자는 노동운동에서조차 무시당해왔다. 노동운동이 반핵운동을 하긴 하지만, 시민운동이 하는 반핵운동을 같이 했지 노조가 독자적으로 반핵운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피폭노동자를 상담하고, 이 때문에 노동쟁의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용직노동자 운동을 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피폭노동자와 함께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목소리를 여러 노조에서 들으려고 하고 있다. 일용직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노조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고 있다. 3월 10일 열리는 집회도 일용직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노조들이 함께 한다.
자료의 또 하나의 효과는 시민운동도 피폭노동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우리 자료를 보고 피폭노동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피폭노동 문제는, 아까 말했다시피 차별과 빈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노동운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반핵을 외치는 시민운동과도 적극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11 사고 이전에도 피폭노동 문제에 집중했나
3.11 사고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1998년에 빈곤 지역인 오사카 가마가사키, 나고야 사사시마, 요코하마 코토부키, 도쿄 산야에서 원전에 일하러 가지 말라고 선전물을 만들어 나눠줬다. 1997년 후쿠시마 원전에서 위험한 일을 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모집했는데, 그런 위험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일자리 없는데, 일하러 가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반응하기도 했다. 그런 반응은 가난한 일용직노동자들의 솔직한 목소리였다. 일자리가 없어서 생활이 어려운데, 일자리가 있으면 어떤 일을 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사업주에게 원전 안에서 어떤 일을 하냐고 질문 받으면 절대 대답하지 말라고 지시받기 때문에 우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98년 ‘원전에 가지 말자’ 캠페인에서 우연히 원전에서 일했던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쉽게 말하지 않았고, 우리를 믿게 되니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는 원전에서 걸레와 수건을 가지고 오염 처리 일을 했다. 그 사람은 도카이 원전에서 한 달 동안 일하다 그만 뒀다. 그의 동료는 같은 원전에서 1년 동안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 사망한 노동자는 회사에서 피폭 기록을 주지 않아 얼마나 피폭됐는지 알 수 없었고, 산재 처리도 못하고 죽었다.
원전 하청노동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가고 있다. 가끔 지역에 가서 원전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소식을 물으면, 노조 관계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백혈병으로 죽었어”라고 말한다. 피폭노동자의 사망에 대해 무감각하고, 보통 발생하는 병에 걸렸다 죽었다고 치부하는 것에 나는 굉장히 놀랐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 ‘피폭노동 생각하는 네트워크’ 출범 예정
[동일본대지진 1년, 현장을 가다(10)] “피폭 전제로 하는 비인간적 노동 없애야”
일본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가 4월 22일 출범할 예정이다.
일용직노동자와 관련 지원 단체, 활동가, 저널리스트 등이 모여 네트워크를 제안하고 있으며, 이들은 3.11 지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1년을 맞아 3월 10일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에서 관련한 집회를 열 예정이다.
일용직노동자 지원 단체에서 활동하는 나카무라 씨는 “1월부터 일본 54기 원전에서 돌아가면서 집회를 열 예정으로,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직접 만날 것이다”며 “피폭노동자와 연결해서 일회용 목숨을 용서하지 않는 투쟁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탈핵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며 “지역에 있는 노조들도 나서고 있으며,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전했다.
나카무라 씨는 “원자력발전소 노동은 피폭을 전제로 하는 비인간적인 노동”이라며 “특히 중층하청구조에 시달리는 것은 일용직노동자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 “일본 노동운동 역사상 딱 한 번 81년 쓰루가 원전에서 원전 하청노조가 결성되었는데, 당시 전일본운수 일반노조 원자력발전소분회이다”며 “당시 분회는 원청을 대상으로 고용보장, 보험 가입, 임금 중간착취 금지, 안전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싸웠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방사능 오염으로 고통 받는 우리는 피폭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며 “예전 원자력발전소분회가 어떤 활동을 했는데 듣고 고민을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와 도쿄전력은 긴급 사태를 핑계로 노동자의 안전은 뒤고 미루고 있다”며 “이 상황에서도 일본 경제산업성 장관은 ‘방사능 선량계를 안 가지고 일하는 작업자는 일본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발언했다”고 따갑게 비판했다.
나카무라 씨는 마지막으로 “지역의 노조와 노동운동가들이 피폭노동 문제에 관심이 적은데, 원전산업에서 일하고 있고,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 반대하는 게 노조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인 것 같다”며 “일본 노동운동의 약점인데, 이를 넘어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용직노동자와 관련 지원 단체, 활동가, 저널리스트 등이 모여 네트워크를 제안하고 있으며, 이들은 3.11 지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1년을 맞아 3월 10일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에서 관련한 집회를 열 예정이다.
일용직노동자 지원 단체에서 활동하는 나카무라 씨는 “1월부터 일본 54기 원전에서 돌아가면서 집회를 열 예정으로, 원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직접 만날 것이다”며 “피폭노동자와 연결해서 일회용 목숨을 용서하지 않는 투쟁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탈핵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며 “지역에 있는 노조들도 나서고 있으며,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전했다.
나카무라 씨는 “원자력발전소 노동은 피폭을 전제로 하는 비인간적인 노동”이라며 “특히 중층하청구조에 시달리는 것은 일용직노동자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 “일본 노동운동 역사상 딱 한 번 81년 쓰루가 원전에서 원전 하청노조가 결성되었는데, 당시 전일본운수 일반노조 원자력발전소분회이다”며 “당시 분회는 원청을 대상으로 고용보장, 보험 가입, 임금 중간착취 금지, 안전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싸웠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방사능 오염으로 고통 받는 우리는 피폭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며 “예전 원자력발전소분회가 어떤 활동을 했는데 듣고 고민을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와 도쿄전력은 긴급 사태를 핑계로 노동자의 안전은 뒤고 미루고 있다”며 “이 상황에서도 일본 경제산업성 장관은 ‘방사능 선량계를 안 가지고 일하는 작업자는 일본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발언했다”고 따갑게 비판했다.
나카무라 씨는 마지막으로 “지역의 노조와 노동운동가들이 피폭노동 문제에 관심이 적은데, 원전산업에서 일하고 있고,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 반대하는 게 노조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인 것 같다”며 “일본 노동운동의 약점인데, 이를 넘어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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